하긴 말두 안하고 이사했을 리는 없고. 그럼 이 밤중에 뭐하러 빈집으로 올라가우? 뭘 놓고 갔다허우? 열쇠는 있소? 그래, 그녀가 떠난 줄을 알면서 나는 왜 저 빈집에 들어가려 하는가? 무의식적으로 이끌려 온 걸음도 아니다. 학원 야간반 수업을 진행중일 때, 수업을 마치고 미끄러운 학원 현관을 나설 점점 굵어지는 거리의 눈발 속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그는 분명 그녀가 갔음을 느꼈다. 그는 거리에서 스스로를 향해 속삭이기까지 했다. 낮에 몰래 숨어 그녀를 실은 트럭이 그녀를 태우고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걸 보지 않았더냐, 한달 전부터 그녀가 그녀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었으면서 마치 그녀가 떠나기를 기다리고나 있었
던 듯, 모른 척하다 맞이한 오늘이 아니었더냐, 고. 모른 척한 이유는 있었다. 나는 스페인에 가야 하니까, 언젠가는 그녀를 떠나야 하니까, 그녀가 가려할 때 보내야지, 그때 상처가 안 되게. 그녀는 갔다. 자주 그녀를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 그녀를 붙잡지 않게 했다. 그녀가 간 줄, 이제 그녀의 집은 빈집인 줄 알면서도, 그는 여기로 오고 있었다, 한사코.
그는 현관문에 열쇠를 꽂다 말고 가만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이사한 방안은 분명 텅 비어 있을 텐데 방금전 열쇠를 문에 꽂자 안에서 무엇이 놀라 후다닥거렸다. 혹시 그녀가 돌아왔나?
부질없이 귀를 기울이니 문안의 기척은 사라지고 조용했다. 그녀가 있을 리가? 그래 있을 리가. 그가 다시 열쇠를 만지려는 적막 사이로 갑자기 옆집에서 켜는 텔레비전 뉴스 소리가 쨍하니 섞여 들었다. 오늘 오후 1시쯤 동대문구 이문 2동 307번지 김선식 씨 집에 세들어 살던 아파트 , 청소원 부부가 나란히 숨져 있는 것을 셋째 딸인 미영 씨가 발견했습니다. 미영 씨는 회사 기숙사에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에 와 현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문이 안으로 잠겨 있고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자살로 추정하고 있으나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타살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대로 망연히 서 있었다. 바람이 뼛속까지 휙 들어오는 것 같아 그는 다시 손을 열쇠에 갖다 대기 전에 손바닥을 비볐다. 어느 날 그녀가 그녀의 손가락에서 빼 그의 왼손 가락에 끼워 준 반지가 오른손 등이며 손바닥에 스쳐졌다. 그는 문을 따로 안으로 들어와 문에 등을 대고 가만 서 있었다. 처음엔 깜깜했던 방안의 어둠이 차츰 익숙해지자, 흰 벽이 보이고 세면장 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그녀가 떼어 가지 않은 선반이 구석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까지 눈에 잡혔을 때, 그는 기타를 풀어 문에 세워 두었다. 봄은 희망이야. 봄이 되면 스페인에 갈 거니까. 거기 가서 빠꼬 데 루시아처럼 악보 없이 플라멩고를 칠 거니까. 그래 그럴 거니까.
그녀를 만난 날도 봄이었다. 모두들 자칭 기타 리스트들인 아는 얼굴들이 모여 객석 의자가 마흔 개도 될까말까한 소극장에서 연주회를 열었을 때, 그 자리에 그녀가 왔었다. 그가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과 마이어즈의 카바티나를 접속곡으로 연주하고 났을 때 그녀는 박수를 쳤다. 그가 사티의 짐노페디를 켜고 마지막으로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치고 났을 때도 그녀는 앉은 채로 계속 박수를 쳤다. 쉬지 않고 박수를 치고 또 쳤다. 그녀가 얼마나 많이 박수를 쳤는디 누구나 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의 손바닥이 얼마나 아플까를. 그래서 연주회가 끝났을 때 그가 극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그녀 곁으로 가서 물었다. 기타 소리를 좋아하는가 보군요. 그녀는 대답이 없고 그녀와 동행한 그녀 곁의 늙은 여자가 가만 웃었다. 그는 둘이 모녀 사이인 줄 알고 이번엔 늙은 여자를 향해 따님이 기타 소리를 좋아하나 봐요, 라고 다시 물었다. 그녀의 엄마가 아니고 이모라는 늙은 여자가 대신 대답했었다. 이 앤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귀머거린 걸요. 귀머거리? 그는 멍하니 선 채로 그녀와 그녀의 이모라는 늙은 여자가 극장을 빠져나가 바깥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걸 바라보았다. 그이 시야에서 두 여자가 아주 안 보이게 되었을 때 그 는 뛰어나가 그녀들을 찾았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는 그녀들을 찾아냈을 때의 그 반가움은, 오래 전 한 여자의 정중한 이별 후 처음 느껴 봤던 것이었다. 육 년만인지, 칠 년만인지, 그 동안 그 육 년인지, 칠 년 동안, 여섯 번인지 일곱 번인지 봄을 보내면서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면서 그는 스페인에 가기라, 했다. 자그만치 저 옛날, 1600년대에 지은, 길이 94미터에 폭이 128 미터의 사방이 둘러싸인 풍취 잇는 마요르 광장에서, 화려한 왕가의 의식과 사나운 투우 축제와 종교 재판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마요르 광장에서, 유랑인들 틈에 섞여 기타를 치리라, 했다. 아,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아란훼스로 가는 열차를 타리라, 황야 속에서 저 혼자 기름진 들판을 이루고 있는 아란훼스, 수많은 나무와 식물로 둘러싸여 있는 아란훼스, 그 왕가의 휴양소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기타를 치리라, 했었다. 그것만이 그에게 여섯 번인가 일곱 번 봄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는 대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