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 무신(武臣)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장수로서의 능력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격과 지도력을 갖추어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서울 건천동 출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邊氏)의 아들로 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유년시절부터 유성룡과는 한 마을에서 같이 자란 의형제 사이로 두 사람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절친하였다고 한다.
생애
이순신은 옛날부터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고 아담하여 근신하는 선비와도 같았다고 한다. 여러 차례 무과(武科)에 응시하다 낙방되기를 반복하다가 1576년 드디어 급제하고 그 직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겸 녹도둔전사의(鹿島屯田事宜)에 보직되어 1586년까지 북방 국경 지대로 나가 여진족을 방어하는데 힘썼다. 1591년 유성룡의 공천으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그는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그 해 5월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일본 수군과의 대결을 시작하였으며 단 1패도 허용하지 않고 계속 연전연승하였다. 돗토리의 다이묘 가메이 고레노리가 그를 시험해보는 격으로 해전을 벌였는데 놀랍게도 황금 부채(히데요시가 고레노리에게 하사한 것)를 노획했기 때문에 그 명장됨을 알았다고 한다. 같은 해 7월 학익진을 사용한 한산도 해전은 그 절정이었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1597년 원균과의 불화에 조선 정부의 오해까지 겹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고 원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원균 함대는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하여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원균도 사망하자, 조선 정부는 이항복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칠천량 해전 도중 도망친 전선 12척과 새로 건조한 1척의 전선만으로 133척의 일본 전선과 싸운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1598년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에서도 승리하였으나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승리의 비결
이순신은 항상 지형과 해로, 그리고 적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또 그렇게 되도록 상황을 만들어나갔다. 이순신의 23전 23승은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은 칠천량 해전에서 단 1번 이순신처럼 하여 승리했을 뿐이었다.
죽은 이후 관직
전사한 직후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604년 선조는 그를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기록하였고,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과 좌의정(左議政)에 봉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다.
주요 저서
난중일기 (亂中日記): 임진왜란 당시 기술한 전쟁 일기.
충무공이순신전서 (忠武公李舜臣全書): 유고 전집으로 정조의 어명으로 교서관(校書館) 관리 유득공의 주도 아래 찬수를 시작하여 정조 19년(1795년)에 간행되었다. 14권 8책의 활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