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항 한국의 유학 사상
한국 민족은 고대로부터 단일민족으로 고유한 언어 사용과 풍습을 배경으로 성장 발전하며 살아왔다. 삼국시대에는 유교,도교,불교 등이 중국으로부터 전래 되었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18세기 이래로 서구의 종교와 사상이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중국의 유학사상은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한국 민족의 생활 윤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유학의 핵심개념은 인(仁)인데 인은 인(人,사람인)과 이(二,두 이)와의 합자 이다.즉 사람의 기본적인 존재구조인 ‘너’와 ‘나’라는 인간관계를 뜻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유학의 목적은 나를 닦는 수기와 남을 다스리는 치인에 있다. 수기를 완벽하게 하면 성인이 되고 치인을 완벽하게 하면 왕이 되는 것이다. 안으로는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왕화를 이룩하는 것, 이것이 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즉 인간의 가치를 고양하고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유학의 근본 정신이다.
한국에 유학이 전래된 것은 이미 1600여 년 이상이 되었다. 고구려 때에 태학을 세워서 자제를 교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유학 사상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 들어와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으로는 불교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경학사상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활용하였으며, 통일신라로부터 고려 전반기까지는 문학적으로 발전하였다. 고려충렬왕 이후에는 성리학이 전래되어 조선 전반기까지는 주자(朱子)의 성리학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유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철학적 유학사상 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이란 용어는 인간의 본성을 이로 보는 학문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전의 유학에 결여되었던 우주론·존재론·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공자·맹자 이래 유학을 재해석함으로써 성립된 유학사상체계이다.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치와 교육의 양면에서 민족사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퇴계와 율곡 같은 위대한 사상가의 연구활동과 업적을 통해 한층 심오하게 발전되었다. 이는 한국의 근세 학술 문화사상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학사상의 특성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강한 인간 중심적인 사상이었다. 즉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보다도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알 수 있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인간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은 특히 사회사상(윤리사상)만을 고도로 발달시키는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인 성인이 되고자 하였으며 현실적으로는 당면한 현실문제를 순리대로 해결하는 이상적인 사회 및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유학의 기본윤리인 삼강오륜(三纲五伦)은 전통 사회의 일상적 실천 원리로서 그 규범 체계가 대중 속에 광범하게 확산되어 사회윤리로 정립되었다. 유교의 정치이념은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써 백성을 교화하는 민본사상과 덕치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역사적인 배경 하에서 발생한 유학은 자연히 현실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윤리적인 특성을 강하게 가진 사상으로서 발전하였다.
유학은 음양의 이치에 따라 대자연의 법질서에 순응하며,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히고 인간 본래의 의미를 찾아서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유학은 한반도에 일찍부터 전래되어,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의 삶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2항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중종 31년에 외가인 강릉의 호죽헌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인 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보고 낳았다 하여 어릴 때에는 현룡(见龙)이라 불리기도 한 이이는, 고향인 율곡리의 이름을 따서 호를 ‘율곡(栗谷)’이라 지었다.
그는 남달리 총명하여, 세살 때에 이미 말과 함께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여덟 살 때에는 고향에 있는 정자에 올라가 가을 풍경을 노래한 훌륭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열세 살 때에 처음 과거에 급제한 후, 스물아홉의 나이로 관직에 나서기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를 하였다. 열여섯 살 때, 그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한 어머니를 여의게 되자,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3년 동안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저녁으로 메를 지어 올리면서 묘소를 돌보았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율곡은, 3년상을 마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불교 사상을 연구하고 도를 닦으며 1년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다시 유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뒤, 속세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에 관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우리 나라의 학문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율곡의 성리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이기론을 알아야 한다. 이(理)는 모든 존재가 바로 그것이 되며, 그렇게 있도록 하는 본래의 성질을 말한다. 그리고 이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바로 기(气)이다. 예를 들어, 꽃밭에 봉숭아씨를 뿌리면 싹이 트고 자라서 봉숭아 꽃이 핀다. 찔레꽃이 아닌 봉숭아 꽃이 피는 것은, 원래부터 봉숭아 씨는 싹이 터서 자라면 봉숭아 꽃이 피는 성질, 즉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도와 수분, 그리고 햇빛에 따라 봉숭아 꽃은 그 크기나 빛깔이 다를 수 있다. 이때의 온도, 수분, 햇빛은 봉숭아 꽃이 피어나게 해 주는 기이다. 즉, ‘이’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며, ‘기’는 활동하고 작용하며 변화하는 것이다.
또 율곡은 학문의 목적이 안으로는 자신을 수양하고 밖으로는 살기 좋은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하여 실을 강조하였다. ‘실’이란 실제를 중시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말로서, 어떤 학문이나 이론도 실제로 소용되고 거두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율곡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주장했던 여러가지 정책으로는 인물중심으로 벼슬에 등용할 것, 백성들의 무거운 세금을 줄여 줄 것, 천민들에게 양민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 말 길(言路)을 열어줄 것,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10만의 군대를 기를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사랑한 율곡의 한결같은 마음을 잘 보여주는데, 당시에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론과 실천을 조화시키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시키려고 애썼던 율곡의 삶과 업적은, 오늘의 우리에게 참다운 학자의 길, 진정한 정치가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3항 퇴계
이황은 조선시대 연산군 7년(1501),지금의 경북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퇴계이며 어진 인격과 뛰어난 학문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일찍이 생후 7개월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퇴계 선생은 어려서부터 모든 일에 경솔함이 없이 신중하였으며, 오만하지 않고 겸허하였다. 그는 어머니께 효도하며 경건히 학문을 닦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았다.
퇴계 선생은 12세 때,『논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9세 때부터 본격적인 학문수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동양철학의 깊은 이치가 담겨있는 『주역』을 공부하며 그 뜻을 알아내려고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일찍이 그는 『주자전서(朱子全书)』를 읽고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주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기이원론(理气二元论)으로 설명하 였는데, 이(理)는 형이상의 것으로서 기(气)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법칙을 의미 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면서도 이(理)를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보아 주자의 이원론을 한층 발전시켰다.
그는 또 심성론(心性论)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论)등을 통해 그의 깊은 철학 사상을 펼치며 주자의 성리학 체계를 집대성하여, 마침내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오늘날 퇴계사상에 대한 연구는 세계 곳곳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때 퇴계사상이 전파된 이후 일본의 개혁을 이루는 사상의 뿌리로 여겨지고 있을만큼 퇴계사상연구가 깊이 이루어지고 있다.
철저한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한 그는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퇴계선생의 학문적 기본입장은 단순히 이론에서 진리를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知)과 행동하는 것(行)이 달라서는 안된다는 지행일치 사상을 그의 70년의 생애를 통하여 몸소 실천하였다.
본래 타고난 성품이 맑고 깨끗한 분이었지만 평생 학문에 힘쓰고 마음을 닦아 실천해 나가는 동안에 그의 인격은 더욱더 깊고 숭고한 빛을 띠어갔다. 그리하여 선생은 가히 한 세상을 환히 밝힐만한 대학자로서의 기틀을 이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