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들이 대학을 다닐 때, 일종의 필독서 목록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게 있었다. 2차 대전 때 나치 정부에 반대한 독일 젊은이들의 저항을 담은 수기다. 주인공은 소피와 한스 숄 남매. 당시 이들의 이야기는 군사정권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시공을 넘어 저항과 자유의 의미를 담은 책으로 폭넓게 읽혀졌다.
22일 서울 종로2가 씨네코아에서 개봉되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이 책의 주인공인 소피 숄의 삶을 다뤘다. 학교에서 히틀러를 비난하는 전단을 몰래 뿌리다 검거되는 순간에서부터 사형에 이르는 5일간을 다뤘다.
대학 때 책을 읽고 20년을 훌쩍 넘어 만나는 영화는 색다르게 읽혔다. 그녀의 삶이 정치적 행위가 아닌 예술적 행위로 보인 것이다. 감옥 안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조사관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초개처럼 생을 버리는 그녀의 삶은 이념이 사라진 이 욕망의 시대에서는 그저 또 다른 욕망의 하나로 보인다. 그래서 신선하다.
뭔가를 주장해도 누구든지 맞다고 인정해주던 시절엔 소피처럼 앞뒤 돌아보지 않는 몰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몰입의 대상이 너무 많아진 지금은 뭔가에 미치고 싶어도 미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소피보다 행복하고 소피보다 불행하다. 치밀한 구성과 밀도 있는 연기, 고색창연한 옛 유럽의 이미지를 담아 영화적으로도 완성도가 높다. 옛날 책과 관련한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 보면 이것저것 생각할 꺼리들이 많겠다.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