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1563년~1589년 3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로,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이다.
许兰雪轩(1563年~1589年3月19日)是朝鲜中期的诗人、作家与画家。本名楚姬,号兰雪轩、兰雪斋,字景樊。籍贯阳川。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도 잘 그렸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이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서 알려졌다. 사후 남편이 이조참판에 증직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으로 추증된다. 허엽의 딸로 허봉의 여동생이자 교산 허균의 친누나이며,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다. 이달(李達)의 문인이다. 강원도 출신.
她有300余首诗与其他散文、随笔合计213首流传至今。在书艺与绘画上也深有造诣。即使经历了与丈夫金诚立、婆家的不和,加上子女的夭折与自己的流产等一连串不幸,还是留下众多艺术作品。1608年(先祖41年)因弟弟许筠的文集在中国明朝出版而始为人们所知。死后丈夫被封为吏曹参判。她被追封为郑夫人。许晔之女,许篈之妹,也是蛟山许筠的亲姊,許筬的同父异母妹妹,李达门下的文人,出身于江原道。
생애 초반
上半生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年幼时跟着哥哥、弟弟学习识字。貌美如花,禀赋过人,记忆力超群,年幼时书读得好,令族人惊奇不已。8岁时作《广寒殿玉楼上梁文》,被视为神童。爱惜其才华的许晔直接教其读书、书艺与绘画。
그의 시재주와 글재주, 서예 재주를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이달(李達)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그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鉴于她的诗才与文采、书艺才华,哥哥许篈让其与弟弟许筠一起拜李达为师,一同学习诗文。
불행한 결혼 생활
不幸的婚姻生活
15세 무렵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芳龄15时,在家庭安排下她与安东金氏金诚立结为伉俪,但婚姻生活并不圆满幸福。她过人的诗文才华令丈夫敬而远之,同时受到婆婆的刻薄折磨。随后丈夫登第升官,开始不顾家庭生活,在外面风流成性。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년(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因婆媳间的不和,她在婆婆的虐待与仇视下过着痛苦的日子,1560年(先祖13年)父亲许晔客死异乡,子女相继因病离去。
作品选读: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去年丧爱女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今年丧爱子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哀哀广陵土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双坟相对起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萧萧白杨风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鬼火明松楸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纸钱招汝魂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玄酒存汝丘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应知第兄魂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夜夜相追游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纵有服中孩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安可粪长成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며서
浪吟黄坮词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血泣悲呑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