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 서역출사도)
장건(張騫)은 서한시기 외교가로서 한무제가 즉위할 때 그는 이미 조정에서 "랑(郞)"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서한 건립초기 북방은 강대한 유목민족- 흉노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흉노족은 춘추전국시기 이후 계급사회의 문턱에 들어서 일부 노예제 소국들을 건립했으며 국왕을 "선우"라 칭했다. 초한전쟁시기 모순선우는 기회를 잡아 세력을 확대했으며 주위의 부락들을 전후로 정복하고 중국 동북부와 북부, 서부 등 광대한 지역을 조종해 통일된 노예주정권과 강대한 군사기구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흉노 노예주귀족은 늘 강대한 병사대오를 거느리고 한나라의 영토를 침점했고 중원지역에서 소란을 피웠을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대월지와 연합하고 서역과의 교류를 강화하는 것은 흉노의 조종국면을 타파할 수 있었으며 한나라의 위망과 영향력을 건립할 수 있었다.
한무제의 명령하에 장건은 과감하게 국가와 민족의 중임을 떠메고 서역의 길로 향했다.
장건의 첫번째 서역행은 중국 신강일대와 내지의 연계를 강화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중국과 중부아시아, 서부아시아 및 남유럽의 직접적인 거래관계를 건립했다. 후세인들은 장건의 발자국에 따라 "실크로드"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뒤로 한무제는 진일보 서역을 개척하고 흉노를 고립시키기 위해 장건을 "중랑장"으로 임명한 후 두번째로 서역에 파견했다.
장건이 두번째로 서역에 떠날 때 하서주랑은 이미 막힘없이 잘 통해 있었다. 장건은 300여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사절단을 거느리고 매 사람마다 말 두필씩 챙겨 각각 교통과 운반도구로 이용했으며1만마리 이상에 달하는 소와 말, 대량의 황금과 화폐, 견직품을 갖고 호호탕탕하게 서역의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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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은 풍부한 선물을 갖고 서역의 오손(烏孫)에 도착했으며 오손이 한나라와 동맹관계를 맺고 공동으로 흉노를 격파 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한나라는 첫째, 오손의 동부지역을 돌려주고 둘째, 한나라 공주를 오손국왕에게 시집보내며 셋째, 오손과 한나라는 형제국으로 맺는 것에 동의한다교 밝혔다.
장건의 두차례 서역출사는 예정된 목표에는 도달못했지만 그 의의와 영향력은 장건의 직접적 사명을 훨씬 초월했다. 장건의 서역출사는 중국 신강지역으로부터 서부아시아에 이르는 교통요로를 통해 유명한 "실크로드"를 개척했고 한나라와 서역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의 연계를 강화했으며 중국의 통일된 다민족 봉건국가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