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梨泰院”地名的由来是从李氏朝鲜时期的孝宗(1619—1659)时开始流传下来的。
효종때 배밭이 많은 동네라는 까닭으로 배나무 이(梨)가 붙은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렸다고 전해 내려온다.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해 살았다는 뜻으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왜란중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여서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이란 이름을 붙였다는주장도 나왔다.
孝宗时,由于当时“梨泰院”的梨地很多,所以在地名前添加了一个梨树的“梨”字,被称为“梨泰院”。壬辰倭乱时期,倭军归化于此,由于他们长期居住在这里,也有取义“异他人”这样的语源而产生“梨泰院”地名由来的说法。壬辰倭乱后那些回不去日本的倭军与遭到这些倭军性暴行的妇女所生的孩子主要都聚集在梨泰院这一带生活,所以也有“이태원”的地名是取自“이”—不同的异、”태”—胎盘的胎“异胎圆”之意这样的说法。
그러나 이태원은 이방인 공동체 성격이 강한 곳이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조선 때부터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일본군 사령부가 머문 뒤 군사지역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군대가 1882∼1884년 주둔했고, 1910∼1945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한국전쟁 뒤 미군이 이태원 상권을 주도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형성된 이태원은 미군 유흥가로 거듭나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但是就梨泰院这个地方具有强烈的异方人共同体性格的说法大家的意见都是一致的。从朝鲜时期开始,这里就是一个与军事密切相关的地方。在日帝强占期时曾作为军事用地存在,随后日军司令部也在此设立,至此“梨泰院”作为一个军事地域的正体性也得以初步显现。1882∼1884年为了镇压“壬午军乱”而进入朝鲜的清军就驻屯在此,1910∼1945年日军在此设立了朝鲜司令部,朝鲜光复后美军则占据了这个地方,并在抗美援朝战争后主导了这里的商圈。20世纪70年代从美军基地流出的物品逐渐形成了一个完整商圈的梨泰院随后进驻了像雨后春笋般涌现的大大小小的红灯区和夜总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