汉武帝
중화 제국의 군주 한 무제(汉武帝)
중국 제 7대 황제, 한무제 유철은 기원전 140년에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한무제는 어렸지만 즉위 직후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뛰어난 전략으로 문무 양쪽에 큰 업적을 세워 한 나라를 그 당시 세계 최강의 대국이 되도록 했다. 따라서 중국은 한무제의 손에 의해 동북아시아의 한 국가를 넘어 세계제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무제는 강력한 중앙 집권 정치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를 등용하여 유학을 중앙 집권 정치에 접목시켰다. 한 무제는 하늘은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로 황제는 바로 그 하늘의 아들, 곧 천자라는 점을 널리 알리며 제후들과 백성들을 강력하게 통치하였다. 한 무제는 진시황과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이는 두 황제가 모두 강력한 국가 법을 기반으로 중앙 집권 통치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무제는 진시황 보다 뛰어난 전략과 정치력으로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되게 하고 제후나 고위관료들에게 분산되지 않게 적절히 제거와 등용, 회유를 함으로써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또 그는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여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다.
이러한 강력한 황제의 힘으로 그는 변방과 아시아 중심부를 향해 여러 번 군사 원정을 실시하여 중화 제국의 판도를 신속히 확대시켜 나갔고 한 무제는 진시황 이후에 새로 나타난, 위대한 업적에 빛나는 중화 제국의 군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李世民
‘贞观之治’ 당 태종(唐太宗)
중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왕조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 중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왕조는 단연 당나라 일 것이다.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당 태종 이세민이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칭송되고 있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태종 이세민은 비록 형제의 피를 뒤집어 쓰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훌륭한 정치하고 근검절약을 생활화 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황제 초기였을 당시 그는 수왕조의 멸망을 통해 군중이 위대함을 깨닫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는 백성을 물, 임금은 배라고 비유하며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으나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水能载舟,亦能覆舟)’고 하였다. 그는 백성의 요 역을 가벼이 하고 세금을 줄이라고 명령하였고, 백성의 생활은 풍족했다. 이렇게 그의 통치아래 이 시기는 오랫동안 태평성대로 일컬어지니 사람들은 당 태종의 연호 贞观(정관)을 사용하여 ‘贞观之治(정관의 치)’라 불렀다.
당 태종은 대외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일찍이 북방민족과 돌궐을 평정하였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당대의 영토는 한 선제가 재위할 당시를 넘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멀리 총령(葱岭), 북으로는 막북(漠北), 남으로는 남해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관의 치’시기는 중국왕조상 유일하게 탐관오리가 없던 왕조이다. 이것은 당 태종 이세민이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정치적 업적인데, 황제가 솔선수범하여 깨끗하고 자율적인 통치를 하니 관리가 탐관오리 할 동기가 매우 적었고 그 죄도 무거워 쉽게 그리할 생각이 들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각종 비리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정치권에서 당 태종의 이러한 자세를 거울로 삼아 배워야 할 것이다.
康熙
61년간의 전성기 청 강희제(康熙帝)
보통 우리는 강희제 이후 옹정제와 건륭제에 이르기까지의 130여년의 청의 전성기라고 부르는데 강희제의 치세가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강희제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즐겼다. 그는 8세에 즉위했고, 14세에 직접 통치하기 시작해 61년 동안 제위에 있었는데 긴 재위 기간 동안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대륙을 통일한 것이다. 청이 중국을 차지한 후에 많은 반청세력이 있어 ‘삼번의 난’이 있었지만 그는 난을 평정하며 안정적인 통치를 계속했다.
강희제의 일상생활은 검소했으며 백성들을 많이 생각했다. 여섯 번의 남방 순행 때에도 비용은 내궁비로 충당하여 지방에 누를 끼치지 않았고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와의 국경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몽고원정, 티벳트 점령 등 원정을 거듭하여 국위를 선양하였음에도 불구하교 국민들에게 증세를 하지 않고, 오히려 부세면제의 처지를 취하기도 했다. 이는 강희제의 검소함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정치 분야에서도 개혁을 단행하며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동등한 황제의 천민’임을 선언하고 차별을 철폐했다. 또한 학자들을 모아 강희자 전을 편찬하여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다방면으로 두각을 나타낸 군주였기에 재위 61년동안 청의 전성기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