青苹果的国道 — 裴秀雅
“그 존재에 치열하게 연연하지 않던 연인이라 할지라도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그렇게 생각날 수가 없더라. 전화가 기다려지고.”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이웃에 살던 사촌은 저녁을 먹으러 놀러 와선 내 방에서 이렇게 속삭이곤 하였다. (…)
안방에는 TV에서 연속극 소리가 요란하고 오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사촌은 새로 데이트를 시작한 의대생에 관해서 쉴 새 없이 말한다. (…)
커다랗게 틀어놓은 연속극 소리는 좁은 집 안에 가득하였다.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꿈속에 그리던 황홀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유부남이었다.
아름다운 소녀와 그 남자의 부인은 괴로워하면서도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는데,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밤에는 술을 마신다.
거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남자에게 그의 조그만 딸이 다가와,
“아빠 왜 술을 마시는 거야” 하니까 “응, 괴로워서 마신다.
이 세상에 내 괴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너는 나중에 엄마처럼 그러지 말아라” 한다.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주말 저녁에는 언제나 집 안에 그들의 대사가 가득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 안다.
월요일 날 학교에 가면 여자아이들이 강의실에서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시면서 그 연속극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였다. (…)
“그 애와 결혼하면 참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촌은 투명한 매니큐어를 손톱에 바르면서 말한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내가 어디서 또 그런 애를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엄마도 은근히 좋아한다 너. 전화 오면 빨리 바꿔주고 지난주에는 원피스도 사주더라.
아빠는 데모만 안 하면 누구든지 좋댄다.”
그러던 사촌은 정말로 그 남자애와 결혼하여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위대해 보이기도 하고 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남같이 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