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노인과 양몽환 그리고 하림은 제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동녘 하늘이 붉게 타오르며 날이 밝아올 무렵 순풍
에 돛을 단 쌍돛의 배는 악양 강변에 천천히 닻을 내렸다. 그와 함께 앞
과 뒤에서 큰 배를 호위해 해 오던 배도 멈춘다. 양몽환과 하림이 탔던
조각배도 그들에게 이끌려 왔음은 물론이다.
양몽환과 하림은 노인에게 큰 절을 하며 자기들의 배인 조각배로 옮겨
탔다.
「노선배님! 안녕히 가십시오.」
「고맙소! 귀형도 보중하기 바라오.」
이래서 하루 동안의 해후는 끝났다.
노인이 탄 배와 호위 배들이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양몽환과
하림은 놓였던 대로 손 하나 대지 않은 자기들의 짐을 들고 배에서 내려
악양 땅을 밟았다.
(과연 노인은 기인이며 은인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있으리라.)
노인의 은혜에 거듭 감사하며 양몽환과 하림은 싸늘한 새벽바람을 얼굴
에 스치며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채 날이 새지 않은 탓인지 평화스러운 마을은 새벽잠에 빠진 듯
조용하고 고요했다.
양몽환과 하림은 경공법(輕功法)을 써서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이십 여리를 날아 붉은 담장이 보이는 마을 앞
에 사뿐히 내렸다.
「심소저! 저기 보이는 붉은 담장집이 우리 집이요.」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본 하림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군요.」
「내가 어릴 때 아버님은 관계(官界)를 떠나 조용히 살고 싶다면서 여기
동무령(東茂領)을 택하였소, 벌써 이십여 년이 되었죠.」
「조용해서 좋아요. 저곳 냇가에는 고기도 많겠죠?」
마을 앞을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을 가리키는 하림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순간, 양몽환의 기억은 십여 년 전 옛일로 거슬러 올라가 옥견(玉
娟)이라는 소녀의 얼굴 앞에서 멎었다.
사촌(四寸)이 되는 옥견(玉견)은 양몽환보다 세살이 위였다. 어릴 때 부모
를 잃고 고모뻘인 양몽환의 어머니가 길렀다. 그래서 양몽환과 옥견은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은 흘러 어느덧 십여 년 양몽환과
옥견의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찍이 일
양자를 따라 현도관으로 들어간 양몽환에게는 보고 싶은 옥견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고 옥견은 옥견대로 양몽환이 무술을 익히고
속히 돌아와 주기만 바라게 된 두 청춘 남녀의 끓는 사랑은 은연중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 일양자와 함께 꼭 한번 집을 다녀가던 날 밤,
양몽환과 옥견은 이별을 슬퍼하며 밤새껏 몸부림치다 다시 장래를 굳게
약속하고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미 장래를 약속한 옥견이 있는 집에 하림 소저를 데리고 들어간다면
옥견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지 않아도 하림은 나를 좋아하고 있는 모양
인데 이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다는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양몽환을 바라보던 하림은
「오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세요?」
하는 말에야 양몽환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굴에 나타날 초조
와 당황함은 감출길이 없었다.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스승, 스승님의 생각을……」
했다.
「옳아요. 지금 어디가 계실까…… 그런데 내가 곤륜파에 입적하면 사부
님을 어떻게 부르면 돼요.」
몽환은 약간 안으로 숨을 쉬며
「사백(師伯)님이라고 부르면 돼요.」
하면서 걸음을 옮겨 놓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