痛苦的记忆越多越好(1)
나는 경남 함양 산골에서 가난한 집안의
칠 형제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내 출생은 그다지 경사스런 일이 아니었다.
뱄으니 낳을 뿐, 기대도 기쁨도 없는 출생이었다.
있는 자식도 하루 세 끼 밥 먹이기가 버거운데,
또다시 자식이라니.
我出生在庆尚南道咸阳郡一个贫苦之家,
七个孩子中我排行老六。
我的诞生算不上一件喜事。
因为怀了所以生了,没有期待和喜悦。
已有的孩子尚且吃不饱,
竟然又多了一个孩子。
모르긴 몰라도 어머닌 날 낳으시고 우셨을 것이다.
젖먹이가 돈이 더 드는 법 아닌가.
하여, 나는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인 채 윗목에 올려졌다.
군불 닿지 않는 윗목에서 사나흘 있으면
제 스스로 목숨줄이 떨어져 나가
집안의 고단을 덜어줄 거다,
할머닌 우는 어머니를 밀치고 나를 윗목에 놓고는
누구든 얘를 건사하면 혼쭐이 날 거다 하셨다 한다.
生下我,想必妈妈没少流泪,
毕竟喂奶意味着家里的花销要增大。
反正我一生下来,
就被包在襁褓里放在了炕梢。
在炕火暖不到的炕梢待上三四天,
我就会自生自灭,
家里的困窘就能稍得缓解。
奶奶推开哭泣的母亲,把我放在了炕梢,
说谁要是照顾我就狠狠训斥。
나는 한겨울 싸늘한 윗목에서 그렇게 보름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살아남았다. 기적은 아니었다.
큰언니가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할머니가 밭에 나가고 들에 나간 시간
생쌀을 씹어 내 입에 넣어주었던 것이다.
我在寒冬中的冷炕梢上过了15天。
我依然活着,但这不是奇迹。
大姐听了妈妈的话,
趁奶奶下地干活的时候,
嚼生米放到我嘴里。
내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이후 집안이 위태로울 때마다 짐처럼 여겨졌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네 살 무렵에 효창동 주택가에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돌아서신 적도 있었다.
我的苦难到这里并未结束。
此后每逢家陷困境,我都被看作包袱。
如果记忆无误,四岁左右我曾被遗弃在孝昌洞的住宅区,
虽然母亲很快又改了主意。
이후 나는 마치 나를 버리려 했던 가족들에게
복수라도 하듯 정말 지겨우리만치
그들의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此后,就像要对抛弃我的家人报仇一样,
我开始无止境地
伤他们的心。
초등학교 4학년 때 담배를 배우고
(물론 들키는 바람에 이내 피울 수 없게 됐다),
고등학교 땐 못 먹는 술을 먹어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툭하면 사고를 쳐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 다니고,
대학은 재수를 하고, 셀 수도 없이 집을 나가 떠돌고.
小学四年级开始抽烟
(因为被发现,当然以后也就不再抽了),
高中喝酒进过医院,
不断闯祸而使母亲经常被叫到学校,
高中复读,无数次离家出走。
내가 기억하는 잘못만 이러한데,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런 연고로 나는 사흘돌이
‘천하에 쓸데없는 계집애’란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我记住的错误就如此之多,
我没有记住的又有多少啊。
正因如此,我是听着
“真是个没用的丫头”这句话长大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