彌 : 꿰맬 미
縫 : 꿰맬 봉
策 : 꾀 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환왕조(桓王條)에 보이는 말이다. 만백이 우군이 되고 채중족이 좌군이 되었으며, 원번과 고거미가 중군으로 장공을 모시는 어려진(魚麗陣)을 폈다.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보병이 이를 뒤따르되 보병이 전차부대의 틈을 연결시키는 전법이다(曼伯爲右拒 蔡仲足爲左拒 原繁高渠彌以中軍奉公 爲魚麗之陳 先偏後伍 伍承彌縫).
춘추시대의 주(周) 환왕은 명목뿐인 주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정(鄭)의 장공(莊公)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장공의 왕실 경사(卿士)로서의 정치적 실권을 빼앗았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장공이 왕실에 대한 조현(朝見)을 중지하자, 이를 구실로 괵(虢)·채(蔡)·위(衛)·진(陳) 네 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정나라로 진격하였다.
허난성 수갈(繡葛)이라는 곳에서 환왕의 군사를 맞은 장공은, “연합군의 좌군을 이루는 진은 어지러운 국내 정세로 전의를 잃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나라 군사부터 먼저 공격하면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환왕이 이끄는 중군에 혼란이 올 것이며, 괵공이 이끄는 채, 위의 우군도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때 중군을 공격하면 승리는 틀림없습니다.” 하는 공자 원(元)의 진언을 받아들여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보병이 전차부대의 틈을 연결시키는 오승미봉(伍承彌縫)의 전법으로 토벌군을 격퇴하였다. 군사들이 도망하는 연합군을 계속 추격하려 하자, 장공은 “군자란 약자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하물며 천자를 무시할 수 있겠느냐. 나라의 안전만 보전하면 그뿐이다.” 하고 이를 제지하였다. 이로써 장공은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으며, 미봉책이란 말이 사서(史書)에 실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미봉이란 본래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하는 조금도 빈틈없는 전투 포석이었는데, 오늘날에는 그 뜻이 변질되어, 아랫돌 빼어 윗돌 막는 임시 변통의 입막음용 꾀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봉책 [彌縫策]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