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는 ‘유불도’ 3교의 자양분을 토대로 1500년 이상을 이어왔다. 유교ㆍ불교ㆍ도교는 우리들의 내면 깊숙이 흐르고 있다. 유불도 3교는 모두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이었지만, 우리의 환경과 정서에 맞게 변화를 거치면서 우리 것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신라에는 3교를 포함한 풍류도(風流道), 즉 선교(仙敎)라는 것이 있어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함은 유교의 가르침이고, 자연 그대로 행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도교의 주장이며, 모든 악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함은 불교의 교화였다. 선교를 따르는 무리들을 화랑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화랑세기≫에 전한다.
선교만큼이나 고대인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불교였다. 불교에서는 불보ㆍ법보ㆍ승보 등 3보를 가장 중요시한다. 이들 가운데 승보, 즉 부처와 경전을 모두 배우고 따르는 승려들을 살펴봄으로써 고대의 불교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승려들의 전기로는 김대문이 지은 ≪고승전≫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 시대에 각훈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이 전하고 있다. 따라서 화랑과 승려의 삶과 신앙은 ≪화랑세기≫와 ≪해동고승전≫을 통해 살필 수 있으며, 한국문화의 이해에 좀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화랑세기≫와 ≪해동고승전≫은 모두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필사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들 책들이 진본이 아닐 수 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역사서인가 소설인가, 필사본 ≪화랑세기≫
7세기 말 8세기 초,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는 최근까지 완전히 없어진 책으로 알려져 왔다. 이 책은 ≪삼국사기≫(1145)에 인용되고 있어 이때까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89년과 1995년에 필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완전히 멸실된 책으로 생각되었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책을 필사한 것으로 후자가 완본이고 전자는 후자를 요약, 발췌한 것이었다. 이들 필사본은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남당 박창화의 다른 원고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박창화(1889∼1962)는 1933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 촉탁으로 근무했으며, 이때 원본을 보고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국내외의 역사서들을 섭렵한 학자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많은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의 유고에는 한국 고대 강역 문제와 관련된 글 외에 백제사ㆍ신라사ㆍ고려사 관련 논고들이 있으며, ≪을불대왕전≫ 등을 비롯해 여러 편의 역사소설도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일본에서 보았음 직한 원본을 현재 찾을 수 없다는 상황과 관련해 ≪화랑세기≫가 박창화의 한문소설이라는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 논쟁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각도로 연구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명쾌하게 일치를 보고 있지 못하다. 옮긴이는 이러한 논쟁에 뛰어들 용기가 없을뿐더러 실력 또한 일천한 관계로 여기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자 한다.
1995년에 발견된 162면의 필사본 ≪화랑세기≫는 김대문이 자신의 아버지 오기공의 저술을 이어받아 완성한 것이다. 본 책의 내용은 크게 서문ㆍ본문ㆍ발문의 세 가지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문에서 화랑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지소 태후가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해 국민들로 하여금 받들게 했으며, 그 무리를 풍월이라 했고,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했다고 적혀 있다. 본문에서는 1세 위화랑(魏花郞)부터 32세 신공(信功)까지 32명의 풍월주를 대상으로 하여 출생 배경과 성격, 외모, 혼인과 남녀 관계, 활동, 임명과 퇴임, 화랑도의 조직, 계파 등을 적고, 용모와 행적 등 뛰어난 부분을 찬양하는 찬(讚)을 달았으며, 특히 가족 관계와 계보를 중시하여 마지막에는 생애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26세 진공 조부터는 찬과 생애가 없고, 27세 흠돌공 조부터는 몇 세 풍월주인지도 표시하지 않고 기록 분량도 적다. 발문에서는 아버지 오기공의 유고를 자신이 이어서 기술한다는 간략한 내용을 적고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역대의 화랑은 200여 명이나 된다고 했는데,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540년에서 681년까지 약 140년 동안 풍월주 32명 외에 140여 명의 인물이 전한다. 이 책은 풍월주의 계보뿐만 아니라 화랑의 조직과 활동, 계파에 대한 이야기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7세 설화랑 조를 보면, 8세 문노의 호국선(護國仙)파와 설화랑의 운상인(雲上人)파로 계파가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또 10세 풍월주 미생 조에는 통합원류(통합파)ㆍ미실파ㆍ문노파ㆍ이화류ㆍ가야파 등 5개 파로 갈린 것이 확인된다. 이 밖에도 아랫사람의 임신한 아내를 취하는 마복자 제도, 출세를 위해 아내를 상납했다는 기록, 동성애와 근친혼 등 자유분방한 성관계 기록은 많은 학자들의 주된 논쟁거리였다. 또한 포석정은 연회장이 아니라 왕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포석사가 맞는 표현이라는 사실도 확인되며, 신라 골품에는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의 구분이 있었으며, 이 둘 사이에 대원 신통의 격이 낮았다고 한다. 6세 세종 편에는 미실이 지은 <풍랑가>라는 향가도 있어 국문학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기존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으로, 고대사 연구자들은 빈약한 자료를 보완해 줄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반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창작된 소설로서 역사서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p#分页标题#e#
가장 오래된 승려들의 열전, ≪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은 1215년(고종 2) 승려 각훈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책이다. ≪삼국유사≫에는 10여 곳에서 이 책을 인용하고 있으며, 14세기 초에 요원이 편찬한 ≪법화영험전≫에도 인용되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간혹 책 이름만 전해질 뿐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0년대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경북 성주의 한 사찰에서 발견해, 최남선이 창립한 조선광문회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최남선본). 이 필사본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 책을 다시 필사한 책들만 현존하고 있다. 현재 최남선본과 일본인인 천견윤태랑(淺見倫太郞)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이들 2종의 필사본을 저본으로 한 5종이 전하고 있다.
필사본 ≪해동고승전≫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2권만 전한다. 유통편 1-1(권1)과 1-2(권2)만이 남아 있다. 권1은 삼국의 불교 전래와 그 수용에 대한 기록이고, 권2는 중국과 인도로 구법의 길을 떠났던 승려들의 기록이다. 2권에는 고승 18명 외에 17명의 승려들의 기록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원본은 불교 전래 초부터 각훈의 찬술 시대인 고려 고종 때까지 약 9세기 동안의 고승들을 망라했을 것으로 현재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해동고승전≫은 고대 불교사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이설을 담고 있다. 그 밖에도 고구려에 왔던 순도와 아도의 국적, 불타의 입멸 연대, 신라 불교 전래설 등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내용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이 고승전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최근에 외국인 한국학 연구자들로부터 이 책이 1920년대에 제작된 위서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고승전은 우리나라에 전하는 최고의 고승전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참고하고 인용한 문헌들 가운데 현재 전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사학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기로기≫, ≪수이전≫, ≪신라국기≫, 그리고 <아도비>, <난랑비>, <안함비명> 등의 비문과 최치원이 찬한 <의상전> 등의 잔편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통해서 가능하다.
함께 읽어야 하는 ≪화랑세기≫와 ≪해동고승전≫
화랑들에게 선교와 불교는 별개의 가르침이 아니라 함께 닦아야 할 도였고, 그들은 선ㆍ불의 융화를 위해 노력했다. 7세 설화랑은 풍월주 자리를 문노에게 물려주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가서 살며 후에 미륵선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12세 풍월주 호림공은 낭도들에게 “선교와 불교는 함께 갖추어야 할 하나의 도”라고 천명하고, 원광 법사의 아우인 보리공으로부터 계를 받았으며, 1천개의 관음상을 만들어 아들 자장을 낳았던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이 아들 자장은 선덕여왕 때 대국통을 지냈던 당대 최고의 고승이 되었다. 21세 풍월주 선품공도 선교와 불교에 통달했으며, 22세 풍월주 양도공 또한 불교를 숭상했다고 한다.
원광은 보리공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부처가 되고 아우가 신선이 되면, 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결국 보리공은 원광의 가르침에 따라 화랑도에 들어갔고, 그 지위를 그만둔 뒤에 불문에 들어가 형 원광을 도와 불교의 홍포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해동고승전≫에도 원광이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준 세속 오계의 이야기와 김양도의 두 딸이 절의 노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 또한 선교와 불교의 화합을 꾀하려 했던 각훈 스님의 의중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화랑세기≫와 ≪해동고승전≫은 같이 보아야 고전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조금은 우리 민족문화의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