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박천(博川)에서 출생하였다. 1943년 중국의 난징중앙대학[南京中央大學]을 졸업하였다. 1943∼1946년 《동아일보》 《상해시보(上海時報)》 기자로 활약하고, 1946년 《한성일보》 편집부장을 거쳐, 1948∼1950년 《국제신문》 《태양신문》의 주필 겸 편집국장, 1958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4·19혁명 후 잠시 한국전기통신 사장에 취임했다가 혁신으로 몰린 민족일보사건에 휘말려,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하다(1961∼1969) 풀려났다. 1971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역임 후, 1979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에 취임, 문예진흥기금 모금제도의 개선과 향토문화 진흥에 기여하였다. 1980년 입법회의 의원,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정당), 1983년 민정당 중앙집행위원을 지내고, 1984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과 광복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은관문화훈장,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중화민국 대수영성훈장(大綏影星勳章) 등을 받았다.
한편, 1946년 《백민(白民)》에 시 〈젊은 날의 노래〉, 수필 〈풍진첩(風塵帖)〉 등을 발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한학과 중국 고전에 조예가 깊어 중국 작품의 번역 저술도 많이 남겼다. 작품에는 《천풍(天風)》 《청등야화(靑燈夜話)》 《부운(浮雲)》 《야초기(野草記)》 《낙양(落陽)은 꽃밭》 등의 역사소설과, 수필집 《하 그리 많은 낮과 밤을》, 평론집 《중국 5·4운동의 의의》, 옥중기 〈우수(憂愁)의 세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