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승계한 사람이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이다. 맹자(BC 380-BC 289)는 인간의 본성이 선이라고 하여 내면적인 도덕성을 설교하고 그 본성을 확대함으로서 참다운 왕도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동시에 혁명사상을 주장했다. 맹자를 위시하여 그때까지의 유가의 주류사상에 대립하는 형태로 등장한 것이 荀子이다.
순자(?-BC 230)는 인간의 본성은 악을 행하기 쉬우므로 인위적으로 교정을 해야만 치세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주창한 성악설은 유가의 큰 흐름으로 보면 방류이고 주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로써 교정하여 유덕한 군자가 선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하여 전제군주의 지배를 긍정하는 이론을 주장했다. 이 생각으로부터 한비의 법가사상이 나온다. 각국이 할거하는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중화민국을 건립한 것이 진나라의 시황제이다(BC 221).
기원전 2세기에는 漢의 무제가 董 仲舒의 설을 채용한다. 이것으로 유교는 국가적인 교학으로서의 자리를 얻게 되고 왕조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수나라부터 유교가 과거의 시험과목이 되고 유교가 전성기를 구가한다. 五經博士가 설치된 것도 이즈음이다. 漢에서 唐의 중기까지의 시대에 있어 유교의 경전에 제시된 내용을 一字一句까지 자세히 추구하려는 풍조가 있었다. 이것을 "訓誥의 學"이라고 한다. 唐의 중기 이후에는 귀족제도가 붕괴하여 宋의 시대가 되면 신흥의 지식인이 정면에 등장하고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