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등교육기관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의 태학(太學), 신라의 화랑교육과 국학(國學),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 조선시대의 성균관(成均館) 등이 바로 그것이며, 이런 기관은 당시의 지도적 인물을 양성함에 있어 훌륭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고등교육은 조선 후기, 서양의 문물제도가 유입되면서 비롯되었으며, 초기의 고등교육기관은 대체로 세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즉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학교, 정부에 의하여 설립된 학교, 민족의식이 강한 민간인들에 의하여 추진 ·설립된 학교 등이다. 그러나 이들 고등교육기관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어, 한국인의 고등교육에의 취학기회도 많은 제한을 받았으며, 그 내용도 대개 문학과 법률분야에만 문이 열려 있었고, 공학(工學)분야는 거의 폐쇄되어 있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의 한국고등교육 통계를 보면 교원수도 1938년도의 대학교수 총 658명 중에서 한국인 대학교수는 불과 221명으로 겨우 1/3을 차지할 뿐이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한국의 고등교육은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환경을 맞아 크게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광복 당시 남한의 19개 고등교육기관에 7,819명의 학생이 있었으나, 1981년에는 특수학교를 제외한 고등교육기관의 수가 246개로 13배 정도 늘어났으며, 학생수는 75만 2476명으로 96배 이상의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급속도의 팽창으로 인하여 초기에는 교원수 ·수용시설 ·대학교재 등이 모두 부족한 과도기적 현상을 겪어야 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 해방된 모든 나라가 밟아야 했던 발전단계의 하나로, 오히려 한국은 그 기간을 많이 단축시킨 교육모범국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