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1878~1938)한국의 독립운동가, 사상가
安昌浩(1878~1938)韩国的独立运动家,思想家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성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1895년 그리스도 교도가 되었다.
先修韩学,受私塾前辈影响接触新学,1895年成为基督教徒。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을 세우는 한편 황무지개척사업을 벌였고, 1902년에는 미국으로 견너가, 노동을 하면서 초동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한인공동협회를 만등어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고 1906년 귀국해,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평양에 도자기회사와 대성학교를 설랍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죽의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1897年加入独立协会,1899年到故乡西江开办韩国最初的男女共学的学校,同时开展开垦荒地事业。1902年去美国边打工,边重新学习初级课程,建立韩人共同协会,发行《共立新报》。获悉签订乙巳条约后于1906年回国,组织抗日秘密决死新民会,以《大韩每日新报》为机关报开始活动,在平壤成立了瓷器公司和大成学校,组织了青年学友会致力于培养民族的领导人。
1910년에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험의로 투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다시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닝회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신한민보>를 창간하였다.
1910年涉嫌与1909年的安重根刺杀伊藤博文事件有关联而被捕入狱,后再经西伯利亚流亡美国。1912年在那里组织了大韩国民会中央总会,创办《新韩民报》刊物。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독립운동을 위한 노력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폐하게 되고,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虹口公园)푹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 욱살이를 하였다. 1938년 옥살이중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하던 중 상하였다.
3.1运动刚结束就赴上海参加临时政府的组织,创办《独立新闻》,致力于独立运动和独立运动团体之间的联合,但终因日本帝国主义全面侵华而失败。1932年因虹口公园的尹奉吉事件被日本警察逮捕,送还本国入狱。1938年因病保释,在休养期间去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