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1476년 음력 11월 7일 (양력 12월 2일) ~ 1506년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융(㦕), 본관은 전주(全州)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燕山君(1476年阴历11月7日(阳历12月2日)~1506年11月6日,在位1494年~1506年)是朝鲜第10代君王。姓李,名㦕,籍贯全州。是成宗的长男,为废妃尹氏所生,废妃是领议政慎承善的女儿。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이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왕비 추숭을 반대한 사림파 문인들과 갈등하다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빌미로 사림파를 제거했다. 또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발생한 갑자사화에서는 훈구파도 대량으로 숙청되어, 사림, 훈구 양측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母后废妃尹氏被废以后由贞显王后所抚养而长大,但是知道了自己的生母是尹氏之后想追崇自己的母亲废妃尹氏为王妃,却与谨遵成宗遗命、反对追崇王妃的士林派文人产生矛盾,以戊午士祸和甲子士祸为祸端,除去士林派。而且以废妃尹氏私人事件为祸端发生的甲子士祸中,还大量肃清了勋旧派,也使士林、勋旧两方都成为敌人。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기생들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무 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과 월하매 정도 였다. 이는 반정 측에서 연산군을 깍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 같다.
有传言说,燕山君派遣采青史和采红史,把司宪府、弘文馆、成均馆等换成了妓生们所在的集团,这与事实相悖。这些妓生是从高丽时代开始就是歌舞团,而与燕山君有染的女子是广寒仙和月下梅(均为妓生名字)这类程度的。这似乎是反正方为了贬低燕山君而使用的手段。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은 사전에 준비한 사병들로 거병하여,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하여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연산군은 폐위되어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경기도에 추방되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다.[10] 정현왕후는 처음에 주저하는 듯 하다가 바로 반정군의 요청을 수용한다.
1506年阴历9月2日成希颜、朴元宗等以事前准备的士兵起兵,杀害了燕山君侧人,掌握皇宫,拥戴成宗的第二个儿子晋城大君(中宗)为王。燕山君被废之后先是躲在民间,之后被捕,被流放京畿道。这时张绿水等他的后宫妃嫔在汉城府钟路、南大门等地被处以投石死刑,燕山君的幼儿也遭反正军杀害。
음력 9월 2일 새벽, 궁궐의 방화를 틈타 민간복으로 변복한뒤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나온 연산군은 한성부 근처의 한 민가에 숨었으나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즉시 압송되어 폐위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阴历9月2日凌晨,趁着宫廷放火的当儿,换上便服后骑马离开皇宫的燕山君,虽然藏在汉城府附近的某民宅中,但是被一名追击他的朴元宗的士兵逮捕。立马被押送,被废后发配江华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