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학의 제3단계
조선 초기 세종 때의 한글창제와 이후 15세기 들어 국학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한글 창제로 인하여 우리말을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세종은 새로이 만든 한글로 ≪용비어천가≫를 지어 경학과 역사학, 문학이 한데 어울려진 영웅서사시를 창작해냈다.
석가여래의 일대기인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세조 때에는 ≪석보상절≫을 지어 출간하는 문화적 업적을 이루었다. 또한 ≪동국정운≫이 만들어져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는 방법을 구축하였다.
우리 나름의 문자를 창제하였다고 하는 일은 민족의 자존과 자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15세기에는 중국문화에 비견될 수 있는 우리 나라 문화를 체계적으로 편찬하였으니,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동문선≫, ≪국조오례의≫ 편찬 등이 그것이다. 이는 당시 학문의 최고 수준의 방식으로 종래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화적 업적이었다.
조선왕조는 건국하면서부터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정립하면서 불교문화가 쇠퇴하고 사상적으로 편협해지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근거를 둔 양반문화는 국학의 기반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초기의 주자학은 통치제도 정립의 정신적 지주와 통치이념으로 작용하여 예제(禮制:상례에 관한 제도)의 성립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는 지방 학자들에 의하여 성리학의 본체론적 연구를 심화시켰다. 이들 학자들의 성리학 연구는 현실문제를 외면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도덕적 지성인을 배출한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