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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 國學 ]5

发布时间:2012-07-02     来源:互联网    进入韩语论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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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국학의 제4단계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17세기 전반기의 청나라에 의한 중국왕조의 교체는 우리 나라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침입의 충격은 현실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왜란이 경국대전이 제정된 이후 새로이 변화된 사회와 경제 문제를 크게 증폭시켜 전후의 복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전세제도의 개혁, 대동법의 실시, 모병제에 의한 5군영제로의 변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을 개인 학자들이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익의 ≪성호사설≫,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 소위 실학자들의 개혁안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들 실학자들의 개혁안에서는 ≪경국대전≫의 체제를 비판하고 현실에 실현되어야 할 대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서양학문이 ‘서학’이란 이름으로 중국의 번역서를 통하여 들어왔다.
 
조선 건국에 있어서 조선의 정치이념과 새로운 시대를 개진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왔던 주자학이 형이상학적인 편향성에 의해서 그 본래의 정치이념과 그 뜻을 달리하자, 주자학에 대한 발전적인 수정을 감행하는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상적인 기운의 일각에서 양명학의 수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왕양명의 지(知)와 행(行)을 함께 가야 한다는 설)은 주자학의 선지후행(先知後行:먼저 이(理)를 알고 난 뒤에 비로소 행(行)해야 한다는 주자의 학설)에 비해서 절실한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였다.
 
서학의 전래로 인하여 중국중심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자국중심적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의 국학은 조선 후기, 이른바 실학파 학자들의 현실적·실용적·합리적·실증적·비판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실학파 학자들에 의한 정신형성은 당시 선각적인 학자들의 새로운 학풍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민계층의 각성과 자각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 국학의 성격은 제3기의 국학이 관료중심에서 개인학자 중심으로 바뀐 점과 학문의 전문화가 이루어진 점, 국민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려 한 점등의 특색을 가진다.
 
18세기를 정점으로 발달한 조선 후기의 국학은 경세치용(經世致用:학문은 실사회에 이바지되어야 한다는 유교상의 주장)·이용후생(利用厚生:국민이 사용하는 기구 등을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풍부하게 하며, 생계에 부족함이 없도록 함)·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를 기치로 해서 전개되었다.
 
이익을 종주로 하는 경세치용은 근기지방의 농촌 환경에서 학문의 목적을 토지제도 및 제도사 등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두면서 발달하였고, 박지원 계통의 이용후생은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상업과 수공업의 유통 및 기술면의 혁신을 강조하면서 전개되었으며, 김정희를 시작으로 하는 실사구시는 현실개혁과 비판정신이 곁들인 것으로 고증적 학문방법을 취했다.
 
이러한 각 유파는 정약용에 이르러 일단 집대성되지만, 이에 해당되는 학자와 사상가들은 남인계열의 학자들과 소수의 소론·노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우리 현실을 역사적으로 파악하여 조선 후기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고 아울러 국사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서 보다 실증적 사실의 규명을 꾀함과 동시에 국사의 체계화·계통화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역사연구가 복고적으로 추진되고 객관적인 고증사학이 발달하였다. 한편으로 당시의 지배사상이었던 성리학의 역사인식이 정통론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발해에 대한 관심, 나아가서 만주에 대한 향수 어린 관심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이긍익 (李肯翊)의 ≪연려실기술≫,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海東繹史≫와 같은 역사서가 나오게 되었고 역사뿐만 아니라 말과 글에 대해서도 비상한 관심이 경주되었다. 최석정(崔錫鼎)의 ≪경세훈민정음도설 經世訓民正音圖說≫,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 訓民正音韻解≫, 유희(柳僖)의 ≪언문지 諺文志≫ 등은 이른바 한글 연구의 이정표적 저술들이었다.#p#分页标题#e#
 
이 밖에도 국학은 여러 방면으로 분화되어 발달하였다. 학문이 될 수 있는 것은 분과별로 개발되었다. 경학에서는 윤휴(尹鑴)가 ≪중용설 中庸說≫에서, 박세당 (朴世堂)은 ≪사변록 思辨錄≫에서 신성불가침의 주자의 경서 해석에 이설을 제기하였고, 정제두(鄭齊斗)로 대표되는 양명학의 사상체계가 형성되었다.
 
시문에서도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기발한 문인들에 의해서 종래의 도문일체(道文一體)의 전통을 벗어나는 순수한 문예적인 문체가 시도되었는가 하면, 시의 세계에서는 사회시가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미술에서의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나라의 산수를 사실대로 그리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도가 새롭게 등장하였으며, 음악에서는 양반사회를 풍자하는 판소리가 서민문화로 새롭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지도를 정확하게 그리는 정상기의 ≪8도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청구도≫가 그려졌으며 우리 나라의 농법을 연구한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16지≫ 등이 정리되어 농법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역산·기술학·금석·전기에서도 종래의 학문의 수준과 관심에 비해서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이와 같은 수준과 범위는 여러 전문학자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 국가적 사업으로 이룩된 ≪동국문헌비고≫에 수렴되었다.
 
당시 국학의 공통적인 경향은 첫째, 현실의 역사적인 인식이었다. 조선 후기 현실의 재편성을 위한 구조적인 수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역사 속에 투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학문의 입각점과 연구의 안목을 우리 나라 중심으로 삼는 것이었다.
 
둘째, 국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부분 불우한 환경에 있던 학자들이었다. 정계에서 소외되었거나 중인·서얼·출신 같은 사람도 있었다. 셋째, 국학의 업적이 당시만 해도 이론적인 면, 또는 이상적인 면에만 머물렀다. 넷째, 국학자의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방의 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국학의 관심이 전통적인 주자학의 묵수(墨守)를 고집하는 입장보다는 이에 회의를 품고 사상적인 전환을 꾀했던 일부의 진보적인 학자와 양명학자들에 의해서 강하게 의식되었다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의 국학은 우리 나라의 학술사 내지 문화사에서 일종의 문예부흥과도 같은 시기였고, 우리 나라의 정신사적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최후를 장식하는 사상체계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조선 후기의 국학의 정신은 한말의 사상계에도 그대로 직결되었다. 이른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사상체계에도 직접 간접으로 계승되었다. 박규수(朴珪壽)와 개화파에 해당하는 김옥균(金玉均) 등의 계열이 박지원·박제가 계통의 사상체계와 연결되고, 위정척사의 허전(許傳)이 이익 계열의 인물임은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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