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국학의 제5단계
일제강점기의 국학은 일본의 침략성에 의해서 말살되어가던 한국의 얼을 지키고, 그 정신적 소산인 말·글·역사, 그리고 한국적인 문화요소를 새삼 찾아내어 이를 드러내려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국학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형성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또한 우리 역사상 민족, 동포라는 용어가 최초로 표명된 시기이고 종래의 유학자들이 서양학문의 수용을 하여야 한다고 인식한 1890년대 말 애국계몽운동으로 교육열이 고조되고 민족국가의 실현을 위한 문화, 정치의식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 때의 국학운동은 나라 안과 나라 밖에서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주시경이 우리의 말과 글을 비로소 근대적인 어학으로 정립하기 시작했고, 장지연이 ≪조선유교연원 朝鮮儒敎淵源≫과 ≪일사유사 逸士遺事≫ 등 새로운 시각에서 저술을 냈다.
또한 신채호에 의해서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와 같은 민족주의사학이 개척되었고 최남선이 주재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국고운동(國故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신문과 학회지를 통한 활발한 민중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이 무렵은 전통적인 학문연구방법이 근대적인 학문연구방법으로 바뀌고 있던 상황에서, 국학에 일본의 어용학자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던 시기였다. 일본 학자들에 의한 관심은 한국의 침략을 위한 기초적인 조사와 연구뿐만 아니라 침략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근대적인 학문연구방법을 가진 일본인 학자들이 한국의 역사·고고학·어학·역사지리·민속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조사·연구가 진척되고, 한국연구의 편익을 위하여 조선고서간행회를 조직하여 많은 희귀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와 역사가 많이 왜곡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무렵의 국학은 일본의 이러한 문화적인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주시경·장지연·신채호의 학문이 더욱 그러하였다.
그 뒤, 이런 국학의 정신은 발전되어 황의돈(黃義敦)·권덕규(權悳奎)·최남선 등에 의하여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가 저술되고, 오세창(吳世昌)·이능화(李能和)·안확(安廓) 등에 의해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각 분야의 연구저술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국학의 개념이 형성될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정인보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뒤의 朝鮮史硏究), 안재홍(安在鴻)의 ≪조선상고사감 朝鮮上古史鑑≫, 문일평(文一平)의 ≪호암전집 湖巖全集≫ 등의 성과가 있었다. 백남운(白南雲)의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이청원(李淸源)의 ≪조선사회사독본≫(뒤의 朝鮮歷史讀本) 등과 같은 유물사관에 의한 저술도 당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국학의 한 분야였다.
그리고 정인보에 의해서 주관된 신조선사에서 ≪성호사설≫·≪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담헌서 湛軒書≫·≪여암집 旅庵集≫ 등을 간행하여, 국학의 연원인 실학의 세계를 새삼 선양하였다.
이어서 국제관계사에 이선근 (李宣根), 경제사에 이훈구(李勳求)·인정식(印貞植)·유자후(柳子厚), 문학에 양주동(梁柱東)·김태준(金台俊)·조윤제(趙潤濟)·이병기(李秉岐), 어학에 최현배(崔鉉培)·김윤경(金允經)·장지영(張志暎)·이윤재(李允宰)·이극로(李克魯)·정인섭(鄭寅燮)·이희승(李熙昇), 미술사에 고유섭(高裕燮), 민속학에 손진태·송석하(宋錫夏), 연극사에 김재철(金在喆)·정노식(鄭魯湜), 종교사에 권상로(權相老)·김영수(金映遂)·오재영(吳在泳), 일반사에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이인영(李仁榮), 사회사에 이상백(李相백)·김두헌(金斗憲) 등이 국학연구에 직접 간접으로 공헌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국학의 연구성과로서 이정표적 업적은 최현배의 ≪한글갈≫과 양주동의 ≪고가연구≫ 등이었다. 이렇게 국학의 내연적 내지 외연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국학연구단체도 조직되었다.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우리의 말과 글이 조직적·통일적으로 연구·개발·선양되고, 진단학회를 통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와 일본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이와 같은 조직이 해산당하면서는 경제사에 최호진(崔虎鎭), 과학사에 홍이섭(洪以燮), 역사에 최남선의 저술이 나오는 정도에 머물고 말았다.
한편 나라 밖에서는 나라를 잃고 망명한 인사들에 의해서 먼저 기도되었다. 중국에서는 박은식이 ≪한국통사 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상을 세계에 고발하였고, 김택영(金澤榮)의 한국 고전의 간행과 선양이 중국에서 있었으며, 신채호의 일련의 저술도 중국망명생활중의 연구결과였다. 백낙준의 ≪한국신교사 韓國新敎史≫도 미국에서의 이루어진 성과였다.
이 밖에도 외국인에 의한 한국학 관계의 분야별 연구물들이 있으나, 국학연구의 주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이 시기의 국학연구는 먼저 민족주의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국학의 연구·개발·선양임과 동시에 일제의 한국침략과 한국적인 문화요소의 말살정책에 저항 또는 대응하기 위한 의도적인 연구도 많았다.
따라서 어떤 경우는 근대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구학(舊學), 전통적인 학문방법을 그대로 계속한 듯한 인상을 주는 연구성과가 있기도 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