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를 둘러싼 조선과 청의 분쟁 배경]
1. 국경 분쟁
간도는 본래 고구려와 발해의 땅으로 우리 민족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뒷날 여진족이 청나라를 건국한 뒤에 이 지역이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 하여 다른 민족의 활동을 금하는 한편, 숙종 때에는 우리나라에 국경선을 확정 짓기를 요청해 마침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졌다(1712년).
2. 간도 귀속 문제 발생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우리 민족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특히 간도 지역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가 황무지를 개척하고 논을 만들어 정착하였다. 그러자 청나라는 간도 개간 사업을 벌인다는 구실로 우리 정부에 대해 한민족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간도 귀속 문제가 일어났다.
[조선 정부의 대응]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보내 백두산 정계비에 있는 경계인 토문강은 쑹화 강 상류이므로 간도는 우리 영토가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임명해 이에 대처하도록 하는 한편, 1902년에는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보내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포함시키고 그곳 주민을 보호하게 하였다.
[청의 영토로 귀속]
1. 청과 일본 간의 간도 협약 체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간도는 청나라와 일본 간의 외교 문제로 바뀌었고, 일제는 중국 침략을 위해 간도를 희생시켰다. 즉, 일본은 만주에 안봉선 철도를 부설하는 권리를 청나라로부터 받아내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간도 협약을 맺은 것이다.
2. 간도 지역 상실
결국 우리나라는 주권을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간도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더욱이 일제는 간도를 청에 넘기면서도 간도 거주 한국인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해 그 뒤에도 여러모로 우리 민족을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