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높은 누각에 올라, 새 노래 짓느라 말로만 슬프다 억지부렸지.
이제 슬픔의 참맛 다 알고 나서는, 말하려다 외려 그만두고 마네.
말하려다 그만두고 내뱉은 한 마디, 아! 아 상쾌해서 좋은 가을날이여.
(少年不識愁滋味, 愛上層樓. 愛上層樓, 爲賦新詞强說愁. 而今識盡愁滋味, 欲說還休. 欲說還休, 却道天凉好個秋.)
소년불식수자미, 애상층루. 애상층루, 위부신사강설수. 이금식진수자미, 욕설환휴.
욕설환휴, 각도천량호개추.
-‘박산 지나는 길의 벽에 쓰다’(서박산도중벽·書博山道中壁). ‘추노아(醜奴兒)’ 신기질(辛棄疾·1140¤1207)
세상물정 모르던 젊은 날 어찌 슬픔의 참맛을 실감할 수 있었으랴. 그럴싸한 시구를 얻으려 짐짓 시름겨운 척 치기 부렸을 뿐이다. 삶의 고비에서 온갖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은 뒤 느끼는 슬픔이야말로 진정 슬픔이라 말할 수 있으리. 한데 슬픔의 참맛을 알고 난 지금, 섣불리 그걸 입에 올리는 게 외려 두렵고 조심스럽다. 시름겨운 심사를 토로하려다 말고 불쑥 ‘아, 상쾌해서 좋은 가을날이여’하고 한마디 내뱉고는 빗장을 지른다. 그 연유가 무엇일까.
당시 남송(南宋) 조정은 중원 땅을 차지한 여진족의 금나라와 화해하느냐 아니면 고토 회복을 위해 결사 항전하느냐로 갈등을 빚었다. 주화론으로 대세가 기울면서 주전파였던 시인은 파직돼 초야로 밀려났다. 애국적 열정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썼고 실전 경험도 있는 무장으로서 시인이 맛본 좌절감은 남달랐을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주화파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로 말미암은 지극한 슬픔을 시인은 하늘을 향한 외침으로 승화하려 한 것일까. 반어적 외침은 그래서 처절한 통곡만큼이나 아릿하게 울린다.
‘추노아’는 사(詞)라는 운문 장르의 곡조명으로 형식을 규정할 뿐 내용과는 무관하다. 대만 가수 덩리쥔(鄧麗君)이 ‘말하려다 그만두네’라는 노래로 이 작품을 불러 더 친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