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내 나이 벌써 오십, 문득 내 자신이 이런 일 겪고 있네.
내 젊은 날의 즐거움 돌아보지만, 추호도 되돌릴 마음은 들지 않네.
시간은 흘러 흘러 멀어져가니, 이 생애에 다시는 또 못 만나리.
가산을 털어서라도 때맞춰 즐기세, 말 달리듯 내달리는 세월이 다할 때까지.
자식에게 재산은 물려주지 말지니, 뭣 때문에 죽은 후까지 남겨둘 텐가.
(昔聞長者言, 掩耳每不喜. 奈何五十年, 忽已親此事. 求我盛年歡, 一毫無復意. 去去轉欲遠, 此生豈再値. 傾家時作樂, 竟此歲月사. 有子不留金, 何用身後置.)
- ‘잡시(雜詩)’제6수·도잠(陶潛·365-427)
석문장자언, 엄이매불희. 내하오십년, 홀이친차사. 구아성년환, 일호무복의. 거거전
욕원, 차생기재치. 경가시작락, 경차세월사. 유자불류금, 하용신후치.
어른 말씀은 귓등으로 흘려보냈던 젊은 날을 추억하는 시인.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개탄하면서도 과거를 재현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때맞춰 인생을 즐기는 게 현명한 노릇이니 가산을 털어서라도 맘껏 즐기겠노라 거침없이 말한다. 쾌락에 탐닉하는 향락주의자의 목소리인 듯도 하고, 염세주의자의 허무의식 같기도 한 시인의 이 엉뚱한 발상은 어디서 기인했을까. 그가 살았던 위진남북조 시대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사상 자유의 바람도 휘몰아쳤다. 인의예지를 절대시한 유교에 대한 반발이 드세고 자유 의지와 개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 와중에 시인은 도가의 무욕지심에 매료된 듯하다.
가산을 털어서까지 인생을 즐긴 이는 한나라 소광(疏廣). 그는 선제(宣帝)로부터 하사받은 거금을 주연을 베푸는 데 쏟아 부었다. 자주 재산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정도로 탕진 의지가 확고했다. ‘자식이 지혜롭되 재산이 많으면 의지가 손상되고 어리석으면서 재산이 많으면 허물이 많아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 역시 노장사상에 심취한 인물이라 도잠(도연명)에겐 죽이 맞는 선배로 비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