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은 그야말로 참새 그물을 놓아도 될 지경.
내 진작부터 빈둥거렸지만 일하는 아이마저 더 게을러져
비 온 뒤 봄풀이 곱절이나 늘어났네.
故人通貴絶相過, 門外眞堪置雀羅. 고인통귀절상과, 문외진감치작라.
我已幽慵僮更懶, 雨來春草一番多. 아이유용동갱라, 우래춘초일번다.
- ‘한가한 생활(한거·閑居)’사마광(司馬光·1019~1086)
분주하던 친구들의 발길이 끊기자 집안은 참새 덫을 놓아도 될 만큼 적적하다. 주인이 할 일 없이 빈둥대니 손님 접대할 일이 없어진 아이조차 아예 일손을 놓아버린 모양이다. 봄비 오자 집 안팎이 잡초로 뒤덮여 어수선하다. 사마광은 정치개혁을 둘러싸고 왕안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파와 첨예한 갈등을 빚었고 그 와중에 격심한 관직의 부침을 겪었다. 그가 15년간 낙양에 은거하며 ‘자치통감(資治通鑑)’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정치적 좌절이 안긴 이런 ‘한가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내심 염량세태를 좇는 야박한 인심을 탓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바람에 생활은 오히려 더 한가해졌다고 말하는 여유 뒤에 시인의 탄식 아닌 탄식이 묻어난다. 권력 앞에 조변석개하는 이악스러운 우정에 대한 푸념 어린 자조 같기도 하다.
‘참새 그물’의 비유는 사마천이 ‘사기열전(史記列傳)’에서 소개한 한나라 적공(翟公)의 말에서 유래한다. 적공은 자신이 관직에 있을 때는 손님이 집안을 가득 메우더니 관직에서 물러나자 ‘문밖에 참새 그물을 놓아도 될 지경’이라고 개탄하면서 대문에다 글귀 하나를 써 붙였다. 사람은 죽었다 되살아나거나 가난했다 부유해지나 혹은 귀했다 천해져봐야 사귐의 정과 태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권력이나 재물을 잃으면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어진다’는 성어 ‘문전작라(門前雀羅·문앞에 참새 그물을 친다)’가 여기서 나왔다. 문전성시와 정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