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밀어주는 사람이여, 온종일 팔 움직이느라 노고가 많으시네.
살살 하게, 살살. 거사는 원래 때가 없다네.
水垢何曾相受. 細看兩俱無有. 수구하증상수. 세간량구무유.
寄語揩背人, 盡日勞君揮肘. 기어개배인, 진일로군휘주
輕手, 輕手. 居士本來無垢. 경수, 경수. 거사본래무구.
―‘여몽령(如夢令)’ 소식(蘇軾·1037~1101)
물과 때는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공존할 수 없다. 하나는 깨끗한데 하나는 지저분하기에 그렇다. 언뜻 보면 맑은 물에도 때가 있을 법하지만 세밀히 따지고 보면 이 둘은 태생적으로 궁합이 맞지 않는다. 평소 맑은 물처럼 고결(高潔)함을 지향해 온 내가 어떻게 몸에 때가 끼는 걸 방치하겠는가. 그렇다고 나 자신이 한 점 때라곤 없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존재라 고집하진 않겠다. 그러니 등 밀어주는 이여, 필요 이상 힘들여서 팔을 휘두를 건 없네. 나를 돕겠다는 호의에서라면 살살 다루면 그만이지 기를 쓰고 나설 건 없지 않은가.
정치적 갈등을 겪으며 오랜 기간 유배와 좌천의 길을 걸었던 동파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정적(政敵)의 압박이 과도하다 싶었던지 자신의 결백을 익살스레 비유한다. 작품의 서문에서 시인이 어느 사찰에 마련된 공중 욕탕에서 목욕하던 중 느낀 바가 있어 장난삼아 써본다고 했듯이 예사로운 일상사에서 오묘한 삶의 이치를 이끌어내는 그의 재주는 남달랐다. ‘거사는 원래 때가 없다’는 표현도 불교의 게송(偈頌)에서 유래한 말인데 목욕탕이 사찰에 딸려 있는 공간임을 재치 있게 활용한 예가 되겠다.
‘여몽령’은 송대의 대표적 운문 장르인 사(詞)의 곡조 이름으로 자구(字句)의 수, 운율 혹은 분위기 등을 나타낼 뿐 시제나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래서 ‘여몽령’이란 곡조를 사용한 작품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