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혜주에서 식사도 잘하고 꼼꼼히 도연명 시에 화답도 했지.
도연명이 천년에 하나 나올 인물이라면 동파는 백년토록 이름 날릴 선비.
벼슬길 들고 난 건 서로 달랐어도 풍기는 정취는 둘이 꼭 빼닮았지.
(子瞻謫嶺南, 時宰欲殺之. 飽喫惠州飯, 細和淵明詩. 彭澤千載人, 東坡百世士. 出處雖不同, 風味乃相似.)
―‘소동파의 화도시에 부쳐(발자첨화도시·跋子瞻和陶詩)’ 황정견(黃庭堅·1045∼1105)
동파가 대륙의 최남단 광둥성 혜주로 쫓겨난 것은 재상 장돈(章惇) 등 개혁파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그곳은 고온다습한 데다 풍토병이 창궐했기에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험지였다. 하나 동파는 태연자약 식사도 잘하고 평소 흠모했던 도연명의 시에 화답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런 스승의 시와 인품을 공경했기에 시인은 동파 역시 도연명처럼 천고에 길이 빛날 것이라 확신한다. 은거냐 출사(出仕)냐로 둘의 행적은 갈렸지만, 명리에 얽매이지 않는 고결한 기품은 빼닮았으니 말이다.
시제는 ‘도연명 시에 화답한 소동파의 시에 부치는 글’이라는 뜻이다. 도연명 시에 화답했다 하여 ‘화도시(和陶詩)’라 부르는데 동파는 무려 109수나 남겼다. 그 문하에 있던 황정견은 동파 사후 스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담아 ‘화도시’ 말미에 이 시를 덧붙였다. 시라기보다는 도연명에 견줘 스승의 높은 품격을 기린 추모사쯤 되겠다. 그래서인지 시는 서정적 윤기를 배제한 대신 담담한 서술로 일관한다. 동파는 혜주를 거쳐 바다 건너 하이난섬 담주(담州)까지 밀려났지만 시종 초연함을 잃지 않았다. 6년여의 오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오는 뱃길, ‘죽을 고비 넘긴 남방 오지의 삶을 원망하지 않으리니, 이 여행이 내 평생 가장 기막힌 경험이었지’란 시구를 남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