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평론가 김태균이 ‘트로트 팬데믹’을 말했다. 해가 넘게 코비드에 시달려 온 우리에게 또 다른 팬데믹이라니. 이 세상 모든 악은 항시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보이지 않는 적, 곧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자 이 수많은 트로트, 트로트가 우리 국민의 주간(晝間)의 일상을 점령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제 좀 아니다, 많이 아니다. 작년 말을 넘어서며 이제 트로트 역시 팬데믹이 됐다. 코비드 팬데믹은 그나마 정부가 매일 매일 그 상황을 중계라도 해 주지만 이 팬데믹은 질병관리청의 브리핑도, 문자 경고도, ‘5인 이상’ 금지 조항도 없는 정신의 바이러스가 돼 버렸다. 온 나라가 힘을 모아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울 때,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 ‘트로트 바이러스’를 영접한 셈이다.
그런데 이 트로트가 대중과 접신해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자 온갖 ‘이론’과 ‘설’이 제기된다. 트로트는 ‘한국의 고유양식’이고, 일본의 엔카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원조’다. 심지어 ‘엔카의 아버지’라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소환돼 그 부모가 조선 사람이고 또 그 자신 선린상고 출신이라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작고한 작곡가 박시춘이 그에게 ‘한국 고유의 가락’을 엔카에 ‘아름답게 결합’시켰다고 했으니, 이 또한 엔카 조선유래설의 방증이다. 조선민요와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들이 가져다준 서양음악을 결합시켜 이것을 고가 마사오가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이것이 조선으로 역수입된 것이 바로 트로트다. 해서 트로트는 결코 ‘왜색’이 아니다.
허나 내 주위의 민요 전문가 김정희 선생 등 음악학자와 나눈 대화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우선 트로트의 2박자는 우리 전래의 3박자와는 무관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우리 전통의 노래는 1박자를 3개로 나눈 3분박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일본 엔카와 트로트에서 사용되는 5음계는 ‘요나누키 단음계’로서 우리 5음계하고는 전혀 다른 오직 일본에서만 사용되는 일본 고유의 것이다. 곧 리듬과 박자 등 ‘음악 어법’으로 볼 때 그것이 어디에서 유래됐던 엔카와 트로트는 우리 고유의 음악 양식이 아님은 자명해 보인다.
특히 일제 이후 트로트의 성공은 그 노랫말에 있다고 할 것인데, 여기서 조명암 등 당대 트로트 작사가를 통한 식민지 대중 정서의 탁월한 형상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로 이 조명암이라는 가요시의 천재가 1940년대 들어 온갖 군국가요 노랫말을 지어 일제 대동아전쟁의 나팔수 역할을 톡톡히 한 점은 무시된다. 조명암은 해방 후 월북해 인민군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트로트를 통해 ‘어떤’ 민족 정서가 형상화 됐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트로트의 확산은 특히 1920년대, 3·1운동의 무참한 좌절과 깊이 연관돼 있다.
일제시기 대중적 트로트 수용의 사상이론적 짝이 ‘한’(恨)의 이념이다. 민예론으로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3·1운동 직후 발표한 유명한 논설에서 조선미학의 특질을 ‘한’, ‘정’(情), ‘눈물이 넘치는 쓸쓸함’ 혹은 ‘비애미’로 파악한다. 조선자기의 ‘선’(線)이야말로 이 비애미의 성공적 형상화 사례로 들고 있다.
나는 트로트의 미학적 핵심이 바로 이 눈물이 넘치는 쓸쓸함, 곧 눈물이나 슬픔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당대 식민지 조선 민중의 ‘감각적 수동성’ 혹은 ‘수동적 감각’이 선언되고, 또 장려되고, 또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은 1930년대 아리랑을 거쳐 6·25 전후 전시(戰時) 감각으로 이어진 뒤 유신 때 국정교과서로 공인되고, 민족의 대표 정서로 등극해 영화 ‘서편제’까지 죽 이어진다. 식민지 감수성의 대를 이은 계승인 셈이다. 해서 감각적 수동성과 ‘퇴행적’ 감수성이 포스트 민주화 시대의 정서 공백을 메꾸는 상황이 지금 트로트 팬데믹 현상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우리 것에 대한 국수적 집착은 이미 도를 한참 넘었다. 트로트는 아무리 봐도 한류보다 ‘화(和, 즉 일본)류’에 가까워 보인다. 올바른 일본 문화 수용을 위해서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도 해 둘 필요가 있다.
音乐评论家金泰g说“小跑大流行”。多年来困扰Covid的我们的另一场大流行。您是否说这个世界上的所有邪恶总是始于善意?如果这种无数小跑占据了我们人民的日常生活,以便在与无形敌人(即病毒)的战斗中提供一点安慰。但是现在,不是很多,不是很多。自去年年底以来,小跑已成为大流行病。尽管政府每天都在传播Kovid大流行病,但这种大流行病已经成为一种精神病毒,没有得到韩国疾病控制与预防中心的通报,没有文字警告,也没有禁止“超过5人”的禁令。当整个国家联合起来抗击冠状病毒时,这意味着整个人民都聚在一起接受“小跑病毒”。
但是,随着这种狂热感动了公众,成为了新时代的精神,各种各样的“理论”和“理论”被提出了。Trot是“韩国的原始风格”,而我们是“原始的”,而不是日本的enka。甚至连恩卡的父亲已故的Masao都被传唤,他的父母是朝鲜,而他本人则来自Seonrin Sanggo。此外,由于已故作曲家朴施春(Park Si-chun)告诉他“韩国独特的节奏”已与恩卡(Enka)“完美结合”,这也证明了恩卡(Enka)的朝鲜传统。韩国民歌与20世纪初期西方传教士带来的西方音乐相结合,并由已故的Masao带来到日本,这是一种小跑,后来又被传入朝鲜。因此,小跑永远不会“扭曲”。
但是,与我周围的民歌专家金正熙等音乐学者的对话并非如此。首先,小跑的两个节拍与我们传统的三个节拍无关。准确地说,我们的传统歌曲包括三分钟除以三拍。另外,日本enkawa小跑中使用的五角星是“ Yonanuki单音阶”,它与韩国五角星完全不同,并且仅在日本才是日本独有的。很快,就节奏和节拍之类的“音乐习语”而言,似乎很明显,源自的恩卡和小跑不是我们自己的音乐风格。
特别是在歌词中,据说在日本殖民统治之后小跑的成功就在于歌词,而且有人认为,Jo Joongam等当代小跑歌词对殖民地公众情绪的杰出表现起了很大的作用。然而,这就是1940年被称为Joongam的Gayo Shi的天才在1980年代,各种各样的军歌被写成并在大东亚战争中扮演了小号的角色。解放后,Jo Joongam写了北海人民军的歌词。但是有比这更重要的事情。这是通过小跑体现出什么样的民族情感的关键。在小跑之时(尤其是1920年代)流行,3月1日变得与运动和深度的无意义的挫败感相关。
日本殖民时期流行的小跑接受的思想和理论伙伴是“恨”的思想。柳宗悦(Yanagi Muneyoshi)以其民间艺术理论而闻名,他在紧随其后发表的著名社论中将朝鲜美学的特征称为“汉”,“贞”,“寂寞满眼泪”或“阳光”。3月1日运动。朝鲜王朝的“线”被认为是这种非阿米族人的成功例子。
我认为Trot的美学核心在于这种含泪的孤独感,即眼泪或悲伤。由此,宣告,鼓励和创造了当时的殖民朝鲜人的“感性被动”或“被动感”。这个“制成”是1930年至阿里郎的6月25日,战后轰动一时后,在复兴时期被公认为是国家教科书,并成为该国的代表情感,并由此诞生了电影《 Seopyeonje》。这是对殖民地敏感性的继承。因此,在后民主时代,感性的被动和“回归”的敏感性填补了情感空白的情况是当前小跑流行的本质。
国家对我们的痴迷已经走了很长一段路。无论您如何看待小跑,它都比韩流看起来更像“ hwa(日本)风格”。是否需要接受和接受日本文化是必要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