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행동이 판이한 두 자아가 시인의 내면에서 갈등한다. 하나는 매사에 소심하고 신중하다.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궤도에서 벗어날까 전전긍긍한다. 말짱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현실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즐기며 산다. 늘 저 홀로 취해 있다. 둘은 상대의 방식을 서로 비웃을 뿐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다. 둘의 갈등은 그러나 금방 해소된다. 말짱한 정신으로 버티려면 비굴도 감수해야 할 것이니 얼마나 우둔한 삶인가. 취하면 취하는 대로 내 신명을 좇아 사는 게 차라리 현명할 듯하다. 그런즉 이미 낮부터 취해 있는 자아에게 권유한다. 해 지면 촛불을 밝혀서라도 통음하라고.
시인의 진심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진·송(晋·宋)이 교체되는 암흑기를 살면서 부패한 정치와 피비린내 나는 군벌의 쟁투를 혐오했기에 ‘말짱한’ 정신으로 그 탁류에 고분고분 휩쓸릴 수는 없었다. 깨어 있다는 것이 기실은 아둔하기 그지없는 착각일 테니 취해 있는 게 오히려 지혜롭다는 역설(逆說)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위악적 일탈 같기도 한 도연명식 삶의 지향을 범속한 잣대로 가늠하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