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에 남겨진 교훈, 후세에 수치를 남기진 말라.
(淸心爲治本, 直道是身謀. 秀幹終成棟, 精鋼不作鉤. 倉充鼠雀喜, 草盡兎狐愁. 史冊有遺訓, 毋貽來者羞.)
―‘단주 태수 관아의 벽에 쓰다(書端州郡齋壁·서단주군재벽)’(포증·包拯·999∼1062)
드라마 속 판관 포청천(包靑天)으로 더 유명한 포증은 송대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시는 자기 다짐이자 일장 훈시 같은 메시지를 담았으니 시적 운치에 앞서 근엄한 경고문처럼 읽힌다. 삶의 도리나 지혜를 유독 강조했던 송시 특유의 설교식 논조가 맨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관리로서는 청렴을, 개인으로서는 정직을 강조했고 빼어난 재목과 품질 좋은 강철처럼 올곧은 삶을 내세웠다. 무언가의 든든한 지주가 돼야지 갈고리나 낚싯바늘의 용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결기가 묻어난다. 쥐와 참새, 토끼와 여우를 등장시킨 건 탐욕의 함정을 경계한 의도일 것이다. 양식거리에 희비가 엇갈렸던 백성을 염두에 두라는 충고인지도 모른다.
수도 개봉(開封)에 ‘은밀한 청탁이 통하지 않는 이는 염라대왕과 포공(包公)뿐’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는 시인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한 일화. 그가 재임했던 단주(지금의 광둥성 자오칭·肇慶시)는 단연(端硯)이라는 벼루가 유명했고 매년 일정량을 조정 공물로 바쳤다. 전임 관리들이 단연을 고관대작에게 뇌물로 쓰려고 과잉 생산하는 폐해가 그치지 않자 포증은 공물 수량을 엄격히 제한했고, 자신이 이임할 때에는 이를 한 점도 소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후손에 남긴 유훈은 이랬다. “벼슬하는 후손 중에 뇌물죄를 범하면 집안에 들이지 말고 사후에도 선영에 묻지 말라. 내 뜻을 어기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