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에 어른거리는 아침 햇살, 반찬은 온통 목숙 따위의 나물 일색이다. 목숙은 나물로도 먹지만 주로 거름이나 가축 먹이로 썼다. 밥은 거칠고 국은 희멀겋다. 이런 궁핍한 삶을 견디자니 참으로 암담하다. 가난한 선비의 밥상머리 탄식 같지만 당시 시인은 좌보궐(左補闕) 겸 시독(侍讀), 태자를 교육하거나 황제와 학문을 논하는 7품 관리였다. 그 정도 관리의 밥상이 이토록 초라할 만큼 국가재정이 어려웠을까. 때는 당 현종 시기, 물자가 풍족하고 외침이 없었던 태평성대였지만 황제가 사치와 낭비를 엄금했고 탐관오리에 대한 감독이 엄격했던 시절이다.
기실 시인의 의도는 따로 있었다. 당시 간신배의 농간 때문에 소외당하던 태자(후일의 숙종)의 처지를 거친 밥상에 빗댄 거였다. 시인은 스산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동궁전 담벼락에 푸념처럼 휘갈겼다. 세상살이의 불만을 담벼락에 써대는 건 선비들의 흔한 관습, 일종의 대자보였다. 때로 통치자의 눈에 들어 채택되기도 했지만 지극히 위험스러운 도발일 수도 있었다.
우연히 이 시를 본 현종이 즉석에서 시를 지어 대응했다. 소재는 딱따구리였다. “나무 쪼는 부리는 길고 예리하지만, 봉황에 비한다면 짧디짧은 털./차가운 소나무 계수나무가 싫다면 따스한 뽕나무 느릅나무로 쫓아버리지.” 그리고 시 말미에 “자기도취에 빠진 자는 들으라!”고 덧붙였다. 알량한 재주를 믿고 이렇게 풍자하는 작태가 고약하다는 질책이었다. 시인은 곧바로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해버렸다.